Untitled Document
Untitled Document
Home > 청암 송건호 > 청암의 생애
 
 
   
 

송건호 (宋建鎬, Song Kun-ho) 선생은 1926년 충청북도 옥천군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은진(恩津)이며 호는 청암(靑巖)이다. 중농의 가정에서 부모님의 보살핌 속에 어린 시절을 보냈다. 고향을 떠나 한성사립상업학교(현재 서울 한성고)에 다니며 식민지배 아래 있는 민족의 현실에 눈뜨게 되었다. 한문과 역사를 좋아했으며 학창시절 내내 서점을 찾아다니며 폭넓은 독서를 했다. 광복 후인 46년 경성법학전문학교에 입학했고 한국전쟁의 격동기를 겪으며 53년 1월에 교사였던 이정순 여사와 결혼했다. 그 후 56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행정학과 (경성법학전문학교가 여기로 통합됨)를 졸업했다.

 
   
 
 

재학 중인 53년에 대한통신사 기자 공채에 응모하여 외신부 기자로 언론인으로서의 첫발을 떼었다. 이어 조선일보, 한국일보, 경향신문 등 주요 신문사를 거치면서 언론인의 길을 걸었다. 재직중에 세계정세에 관심을 기울면서 민족의 나아갈 바를 탐구하는 역사가의 안목도 키웠다.

 
  선생은 일찍이 편집권의 독립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보였다. 당시 편집권은 경영권의 일부라는 시각이 대세이던 시절 선생은 69년에 <신문편집인협회보>를 통해 ‘신문은 신문인의 책임하에 신문인의 양식에 의해 만들어져야 하며, 편집의 자주성이 제도적으로 확립되지 않으면 안된다’라며 시대를 앞선 주장을 펼쳤다.
   
  72년 ‘10월 유신’ 선포 이후 정권의 언론통제는 강화되었고 기관원들이 언론사에 상주하며 편집에 직접적으로 간여하게 된다. 74년 동아일보 편집국장에 취임했지만 정권의 지시를 따르지 않아 선생은 수 차례 정보기관에 끌려가 구타를 당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언론의 자유를 얻고자 일어선 동아일보와 동아방송의 기자·프로듀서·아나운서가 74년 10월 24일 ‘자유언론실천선언’을 하자 선생은 경영진과 기자 사이에서 중재 역할을 하며 편집국장으로서 어려운 시기를 겪었다. 이듬해 ‘선언’에 참여한 후배 130여명이 강제로 해직되는 데 동의할 수 없었던 선생은 이 사태의 바른 해결을 촉구하며 75년 3월 자진해서 사임했다.
   
  신문사를 떠난 이후 당시 정권이 선생의 취업을 방해하자 여섯 명의 자녀를 둔 가장으로서 선생은 생활고와 정신적 압박감에 시달리면서도 지조를 꺾지 않았고 신념에 어긋나는 글을 쓰지 않았다. 또한 정권이 고위 공직을 제시하며 회유하자 이를 단호하게 거절하며 언론인의 정도를 걸었다. 이 시기에 선생은 집필에 전념하여 『한국민족주의의 탐구』『한국현대사론』 등 역작을 연이어 출간하며 지식인의 사명, 민족의 장래, 분단의 원인 등을 고민하였다. 시대의 지성으로 선생의 글은 지식인과 대학생층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80년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는 과정에서 ‘김대중내란음모사건’에 연루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며 두어 달 사이에 백발로 변할 만큼이나 고초를 겪었던 선생은 2년형을 선고 받은 후 육군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11월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2003년 1월 이 사건에 대한 재심에서 사법부는 무죄를 선고했다)

 

79년 『해방전후사의 인식』(공저)에 글을 발표하면서 선생의 한국현대사 연구의 깊이는 더해갔다. 옥고를 치른 후 상한 몸을 치료하면서 선생은 현대사 연구를 기피하는 풍토를 비판하며 반공이데올로기를 벗어나 민족분단의 원인을 모색하고 이를 극복할 길을 고민하며 현대사 연구의 개척자로 나서게 되었다. 이 시기에 선생은 『한국현대인물사론』『의열단』과 같은 저서를 내며 역사 앞에서 참다운 삶이 무엇인가를 고민했다.

 
84년에는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조선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80년 해직언론인협의회 회원들과 함께 ‘민주언론운동협의회(현 민주언론시민연합’을 결성하여, 초대 의장을 지냈고 기관지 『말』지를 창간했다. 이를 통해 제도권 언론이 보도하지 못하는 사회의 불의· 부패·모순을 알려 저항언론의 불씨를 지켰다. 특히, 86년 9월, 『말』특집호 ‘보도지침’을 발간해 정권의 언론통제 실상을 폭로했고 민주언론운동을 통해 사회민주화에 기여했다.
 

1987년 6월 민주화항쟁 이후 국민이 출자한 신문사를 만들어 국민의 참된 이익을 대변하는 정론지를 만들자는 움직임이 일자, 대중적인 공신력 컸던 선생은 ‘한겨레신문’ 창간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87년 12월 한겨레신문사 초대 사장으로 취임하여 국민의 지지와 열망에 부응하고자 혼신의 힘을 다한 결과 1988년 5월 15일 <한겨레신문>을 창간했다. 선생은 창간사에서 ‘오로지 국민 대중의 이익과 주장을 대변하는 참된 신문’을 발행하겠다고 다짐했다.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독립된 언론’을 평생 소망했던 선생은 사장으로서 편집권의 독립을 보장했고 편집위원장 직선제를 실시했다. 89년 ‘서경원 의원 방북 사건’을 계기로 안기부가 편집국을 압수 수색하는 등 탄압이 가해지자 선생은 정권에 맞서 강경하게 투쟁할 것을 주장하며 언론자유를 지켰다. 91년 4월에 초대 회장이 되었고 93년 6월 한겨레신문사에서 물러났다.

 

선생은 평소 언론인은 소명의식을 갖고 책무를 다해야 하며, 언론인의 지위를 징검다리 삼아 이익과 출세를 구하지 않아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평생 이 말을 지켰다.

 

오랫동안 정권의 감시를 받으며 생긴 불안과 긴장감, 신문사 경영난으로 인한 정신적 중압감 거기에 겹친 고문 후유증으로 건강치 못했던 선생에게 1990년부터 파킨슨증후군이 발병했다. 퇴임 후 병세가 빠르게 나빠져 96년부터는 말조차 하지 못했고 나중에는 전신마비 상태에서 고통을 겪다가, 2001년 12월 21일 타계했다. 사회 각계각층의 애도속에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뤄졌고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다. 24일 광주 국립5·18민주묘지에 안장되어 영면에 들었다. (묘역번호 4-68)

 

슬하에 2남 4녀를 두었다.

1999년 <기자협회보>에서 전국 신문·방송·통신사 편집·보도국장과 언론학 교수를 상대로 설문조사 결과 ‘20세기 최고언론인’으로 ‘위암 장지연 선생’과 함께 선정되다.
2001년 11월 6일 선생의 삶과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청암언론문화재단’이 설립되었다.
2002년 5월 15일 창간기념일을 맞아 한겨레신문사 현관에 선생의 흉상이 세워졌다.
2002년 6월 <송건호언론상>이 제정되어 매년 시상하고 있다.
2009년 6월 23일 국회도서관 개인문고실에 ‘송건호문고’를 설치하고 개소식을 열었다. (기증 장서 7,291권)

 
 
청암의 좌우명
 

인내와 노력, 이 두 가지가 있으면 이 세상에서 못 할 것이 없다. 인내야말로 환희에 이르는 길이다.

나는 글을 쓸 때마다 항상 30년, 40년 후에 과연 이 글이 어떤 평가를 받을 것인가라는 생각과 먼 훗날 욕을 먹지 않는 글을 쓰겠다는 마음을 다짐하곤 한다. 크게는 이 민족을 위해서 적게는 내 자식들을 위해서.어찌 더러운 이름을 남길 수야 있겠나 라는 점을 생각해 본다.

 
 
 
 
 
Untitled Document